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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산업계, 전시경제의 그늘 속 ‘강제 휴직’ 확산…제조업 전반에 구조조정 바람

박문선 2025-10-10 16:44:37

러시아 산업계, 전시경제의 그늘 속 ‘강제 휴직’ 확산…제조업 전반에 구조조정 바람
사진설명: 직원들이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로드의 고르코프스키 자동차 공장(GAZ)에서 가존 넥스트 트럭을 조립하고 있다 / 출처: 로이터

철도와 자동차, 금속과 석탄, 다이아몬드, 시멘트 산업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핵심 제조업이 잇따라 감산과 근무 단축, 임금 삭감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와 서방 제재, 그리고 내수 침체가 겹치면서 ‘전시경제의 피로감’이 러시아 산업 현장 곳곳에 번지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주도한 군수 중심의 경기 부양은 2023~2024년 단기 성장세를 이끌었지만, 이제 그 반대편에서 민간 산업의 침체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주 4일 근무제’와 ‘임금 10% 삭감’을 감내하고 있으며, 일부 공장은 가동을 멈췄다.

전시경제의 반작용, “근무는 줄고 임금은 깎인다”

러시아 최대 시멘트 제조업체 쳄로스(Cemros)는 올해 초부터 건설 산업의 급격한 침체를 감지했다. 중국·이란·벨라루스 등에서 수입된 시멘트가 러시아 내 시장을 잠식하면서, 자국 내 수요는 팬데믹 시기 수준으로 후퇴했다.

이에 따라 쳄로스는 전 직원 1만3,000명을 대상으로 주 4일 근무제를 도입했으며, 쳄로스 대변인 세르게이 코시킨은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이 조치는 필수적인 위기 대응책”이라며 “한 명의 해고자도 내지 않는 것이 목표”라고 전했다.

그의 말은 기업이 단기 생존을 위해 근로 시간을 줄이되, 구조조정만은 피하려는 러시아식 위기관리의 전형을 보여준다.

러시아철도(RZD), 고르키 자동차공장(GAZ), 트럭 제조업체 카마즈(Kamaz), 아브토바즈(AvtoVAZ) 등 산업 거물들도 잇따라 같은 조치를 도입했다.

러시아철도는 70만 명의 직원에게 매달 3일의 자비 유급휴가를 사용하도록 권고했다.

회사 내부 관계자는 “석탄·금속·석유 수출량이 급감하면서 물동량이 줄었고, 이익률이 급격히 악화됐다”고 전했다.

GAZ와 카마즈는 8월부터 주 4일 근무제를 시행했고, 아브토바즈는 9월 말부터 같은 방식으로 근무 체제를 축소했다. GAZ는 이후 10월부터 주 5일 근무를 재개했지만, 업계 전반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채굴 산업도 흔들린다 — 석탄과 다이아몬드, 위기의 상징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원석 생산업체 알로사(Alrosa)는 채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무·관리직 직원의 급여를 10% 삭감하고, 수익성이 낮은 일부 광상 운영을 여름 동안 중단했다.

회사 측은 “해고보다는 급여 조정으로 위기를 넘기겠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감축 규모는 공개하지 않았다.

푸틴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시베리아의 주요 산지인 쿠즈바스(Kuzbass) 지역에서는 올해 들어 151개 기업 중 18개가 문을 닫았다. 러시아 최대 석탄기업 중 하나인 메헬(Mechel)도 8월 손실 악화를 이유로 일부 광산의 가동을 중단했다.

러시아 컨설팅 기관 NEFT Research의 알렉산더 코토프 파트너는 “현재 추세가 이어진다면 2025년 상반기에만 약 1만9,000명의 석탄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며 “정부가 긴급히 구제하지 않으면 산업 전체가 붕괴의 파도를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쿠즈바스의 한 광부 블라디미르(가명)는 로이터에 “지금은 직급이 오르더라도 수입은 오히려 줄었다”며 “모든 광산이 임금을 깎았다. 다들 ‘위기’라는 말만 한다”고 토로했다.

러시아 금속·목재 산업 감산 확산… 구조적 침체 본격화

러시아 주요 제조업인 금속·목재 산업이 감산과 인력 감축의 흐름에 들어섰다. 철강 산업은 여전히 세계 5위 규모를 유지하고 있으나, 최근 생산량이 줄고 조용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다.

러시아 정부 금융안정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당국은 8월 말 금속 산업의 파산 유예와 세제 감면 등 구제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대부분의 금속 가공 공장이 이미 보조 인력을 감축했으며, 내부적으로 4일제 전환을 논의 중”이라고 전했다.

목재 산업 역시 예외가 아니다. 러시아 최대 제지·합판 생산업체 중 하나인 스베자(Sveza)는 가구 수요 급감으로 튜멘 지역 공장을 폐쇄했고, 이로 인해 300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지역 검찰은 이를 “구조적 수요 부진의 결과”로 평가했다.

‘고용은 유지하되 임금은 삭감’… 러시아, 통계 뒤에 숨은 침체 신호

러시아 정부가 “고용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이면에는 단축 근무와 강제 휴직이 확산되는 등 숨은 실업이 깊어지고 있다.

공식 실업률은 2.1%로 사상 최저 수준이지만, 노동부에 따르면 8월 기준 미지급 임금은 16억4,000만 루블로 전년 대비 3.3배 증가했다. 고용은 유지된 듯 보이지만, 실질적인 생활 수준은 빠르게 악화되고 있는 셈이다.

러시아 거시경제분석센터(CMASF)는 군수 중심의 성장 모델이 한계에 직면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비군사 부문 경제는 올해 5.4% 위축됐으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0.7~1.0% 수준으로 둔화될 전망이다.

푸틴 대통령은 “6.8%로 예상되는 물가 상승률을 억제하기 위해 경기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구조적 침체를 가리기 위한 정치적 수사”로 보고 있다.

수출 둔화, 루블 강세, 중국산 공세 — 삼중 압박

러시아 기업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수출 둔화와 내수 위축, 그리고 중국산 저가 공세다.

서방의 제재로 유럽 수출길이 막히자, 러시아 기업들은 아시아 시장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이미 값싼 중국 제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여기에 루블화 강세와 고금리가 기업 수익성에 타격을 주고 있다. 루블화 가치 상승은 수입물가를 낮추는 대신, 수출기업의 이익을 크게 잠식하고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전쟁비용 부담과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기준금리를 16% 수준으로 유지 중이다.

 이로 인해 기업들은 차입 비용 부담이 커져 장기 투자보다 단기 생존에 집중하고 있다.

전시경제의 이면 — ‘성장률 착시’

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1.4% 역성장을 겪었으나, 군수 산업 확대와 국방 지출 급증에 힘입어 2023년 4.1%, 2024년 4.3%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는 주요 7개국(G7) 평균을 웃도는 수준이다.

하지만 성장의 대부분이 전쟁 수행과 방위산업에 집중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민간 제조업, 건설, 운송 등 비군사 부문은 오히려 침체 국면에 접어들며, 산업 구조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러시아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현재 약 2조 2,000억 달러로, 2013년 크림반도 병합 이전 수준과 유사하다. 실질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경제적 진전이 미미한 셈이다.

푸틴 대통령의 첫 집권기였던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러시아 경제는 2,000억 달러 미만에서 1조 7,000억 달러로 급성장했으나, 이후 15년간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쟁 특수에 의존한 성장 구조는 한계가 명확하다”며 “민간 경제 회복 없이는 장기적인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보이는 안정, 보이지 않는 침체”

러시아 정부가 전시경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주요 산업에 대한 세금 유예, 운송 보조금, 국책은행 대출 지원 등 다양한 재정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이는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활용됐던 방식으로, 경기 급락을 완화하기 위한 정부의 전통적 대응책이다.

이 같은 조치 덕분에 대량 해고는 피했지만, 기업들이 인건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임금을 낮추는 ‘임금 삭감형 생존전략’이 일상화되고 있다. 정규직 고용은 유지되지만, 실질 임금이 줄어드는 구조적 문제로 노동자들의 생활 여건은 악화되고 있다.

러시아의 한 경제학자는 “정부는 사회 불안을 방지하기 위해 실업률 지표를 인위적으로 안정시켜 왔다”며 “통계상으로는 고용이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많은 노동자가 ‘부분 실업 상태’에 놓여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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